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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굴하지 않고
희망의 기록을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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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머무르고 진하게 퍼지는 국화의 향기처럼,
강덕경 할머니께서 노인이 되어 그리기 시작한 수많은 그림과 기록을 통해세상에 남기려고 한 것.
그것은 진실과 차세대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죽기 전에 반드시 남겨」라고 말씀하신 「책임자를 처벌하라: 평화를 위해서」라는 작품을 그리고,
죽음을 눈앞에 둔 병상에서도 범죄의 인정과 법적 책임의 이행을 요구하시며,
이 문제를 기억해 주었으면 하셨던 강덕경 할머니의 말씀을 깊게 마음에 새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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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강덕경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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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난 강덕경 할머니께서는 16세 때
일본인 담임 교사에게 추천되어 근로 정신대로서 일본의 비행기 부품 제조 공장에 갔습니다.
그 후 공장에서 도망치셨다가 잡혀 위안소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습니다.

64세가 된 1992년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혀
일본 정부로부터 공식 사과와 배상을 이기기 위한 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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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pyright 저작권 보호 대상입니다.

강덕경 할머니께서는 위안소에서 경험한 아픔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빼앗긴 순정, 사죄하라, 책임자를 처벌하라 등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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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말기 폐암임을 선고받은 후
자신의 모습을 찍고 싶다는 할머니의 소원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
『나눔의 집Ⅱ』(원제『낮은 목소리2』)에, 마지막 모습을 남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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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희망의 치열한 기록

 

1995년 12월, 자신이 폐암 말기임을 알고 병상에 취한 후에도,

피해 사실을 더 알려야 한다며

죽음을 목전에 앞둔 병상에서도 범죄의 인정과 법적 책임을 회피하고 편견으로 위로금으로 속이려고 한 

일본의 '아시아 여성 기금'을 거부하고, 이 문제를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고 말씀하신 할머니.

차세대에 반드시 전해 주었으면 정의와 희망을 끝까지 외쳤던 할머니의 삶에 존경을 바치고,

그 치열한 기록을 이어 갑니다.

 

* 미완성의 그림을 남기고 강덕경 할머니께서는 1997년 69세에 별세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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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전세계 사람들에게 알기를 바랍니다.

평화라는 희망 때문에"

故 강덕경 할머니께서 이 사회에 남겨진
정의와 희망의 치열한 기록을 앞두고
예술가이자 인권 운동가이기도 한 할머니께
깊은 존경의 마음을 바칩니다.

MARYMOND

꽃 할머니 프로젝트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서 용기를 내어 인권 운동가가 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개개인의 삶과 모습을 클로즈업 하는 휴먼 블랜딩 프로젝트입니다.
개개인의 삶에 맞는 고유의 꽃을 헌정함으로써 할머니가 우리에게 말해준 정의와 평화의 메시지, 그리고 할머니의 삶이 영원히 존경받고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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